• 2020 결산
  • 2020. 12. 4. 07:35

  • AAA96에 시달리던 가여운 콱쥐는 드디어 정규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 직행 티켓을 거머쥐었어요!
    콱쥐는 신나서 가을을 담으려고 했어요
    "콱쥐야, 이 독에 가을을 가득 채우면 코시에 진출할 수 있단다"
    그런데 그 독에는 구멍이 나 있었답니다.
    콱쥐는 황급히 독의 구멍을 막을 것을 찾아보았어요.
    하지만 콩쥐와는 다르게 콱쥐에게는 타선을 틀어막아줄 1선발용투도 상대팀의 독을 깨부숴버릴 폭발적인 타선도 사람새끼같은 유격수도 없었어요
    결국 콱쥐는 가을을 담지 못했답니다 . . .




    2000년에 세상이 멸망한다는 유언비어가 다들 틀렸다고 하지만 2000년에 내 세상은 확실히 멸망했다.
    왜냐하면 아빠가 나를 야구장에 데려가기 시작한 게 2000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현대 유니콘스라는 아저씨들 추억 속에나 있는 그 구단의 어린이팬이었고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흐릿해져가는 그 구단
    우리가 팬이 없지 돈이 없냐를 외치는 모기업을 앞세워 압도적인 성적을 보여준 구단이었으며
    직관승률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현린이는 야구란 원래 이기는 스포츠인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세상이 아니라 현대가 멸망했다.

    현대는 멸망했지만 내 야구는 유감스럽게도 멸망하지 않았다.
    울산에서 수원으로 올라와 야구를 같이 봐줄 친구가 없었는지 그냥 딸내미를 야구장에 데려가고 싶었던 건진 모르지만
    스포츠 광팬인 아빠를 옆에다 앉혀두고 아빠 삼진이 뭐야 아웃이 뭐야를 하나하나 다 캐물어가며 봤던 야구는 너무나 재밌었다.

    최강의 유니콘스 꿈의 구단 유니콘스가 사라진 뒤로 이런저런 구단을 기웃거렸지만 마음은 가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구장에 비하면) 초라하고 허름하고 낡은 수원야구장을 잊을 수가 없었다.
    히어로즈가 창단할 때도 엔씨가 창단할 때도 나는 남의 얘기로만 느껴졌다.

    그리고 수원에 다시 야구가 찾아왔다. KT WIZ라는 요상야릇한 이름도 위즈파크라는 애들 장난같은 이름도 아무래도 좋았다.
    야구를 다시 볼 수 있으니까. 다시 한일타운 앞에 야구를 하기 위한 불빛이 켜지니까.

    그리고 대망의 2015년 리그 시작.
    왕조를 쌓아올렸던 현대 유니콘스와는 다르게 케이티 위즈는 이게 프로인지 사회인 야구인지 그것도 아니면 리틀야구단인지
    혹시 야구 규칙을 모르는 것인지, 단기기억상실증이 있어 자기 포지션을 자꾸만 잊어버리는 것인지를 의심케 하는,
    IMF가 2015년에 터졌더라면 저런 새끼들도 야구를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냐며 대 야구시대를 열었을 만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수원에 야구단이 생겼으니까. 수원은 본체만체하고 나는 아무튼 돈이 많다 하던 유니콘스와는 다르게
    위즈는 수원 사랑해요 수원짱!을 외치는 점도 좋았다. 개인적으로 염태영을 좋아해서 염태영이 지원을 많이 해줬다는 점도 좋았다.
    원래 첫 해는 꼴찌하는 법이지. 응원하는 팀이 없었던 거지 야구를 안 봤던 것은 아니므로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2016년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어떻게 첫술에 배가 부르겠냐.

    그리고 2017년이 찾아왔고 나는 저새끼들을 죽일지 내가 야구를 그만 볼지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 때 뛰었던 선수들이 지금 살아있다는 점에서 야구를 끊는 것을 선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직관을 가 줬던 팬들은 프런트 측에서 기념비라도 하나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나는 안 갔다.
    그리고 너무 빡쳐서 그 앞에 홈플러스 지나다니면서 포크레인 끌고와서 저 흉물스러운 빛공해 시설을 밀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8년에 나는 야구를 다시 봤다. 올해는 다르겠지. 어. 올해는 다르겠지.
    2017년에도 하고 설마 올해도 꼴찌하진 않겠지 하고 봤던 건데, 내게 학습능력이 없다는 것을 야구로 판별할 수 있었다.
    어린이들 학습능력용 지능검사니 뭐니 하지 말고 야구를 보여주면 스포츠도 흥행하고 일석이조가 아닐지.

    아무튼 2018년에 기적적으로, 사실 9위를 한 걸 기적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만, 아무튼 9위가 너무 기뻤다.
    순위가 두 자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쁜지.
    한편으로는 현대 때는 말여… 하는 기분도 없잖아 있었다.
    우승을 당연하게 여기던 내가 9위했다고 이렇게 기뻐할 일인가.

    그리고 2019년, 치열한 5위 싸움이 끝나고 팀은 6위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원래 쉽게 손에 넣는 것보다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라 했던가.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한 판이라도 해 보면 좋겠다. 한 게임만.

    '다음에는 다르겠지'를 기대하게 하는 애인이 최악의 애인이라는데 이 야구단은 '내년에야말로'를 기대하게 하는 팀이었다.
    내년에야말로 가을야구를 한다면, 내년이 되면, 내년에는.
    FA도 없고 뭣도 없었지만 아무튼 KT에게는 그것을 기대케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2020년이 되었다.
    2020년 결산인데 왜 과거 얘기를 이렇게 길게 썼냐 하면 2020년은 그냥 2020년이 아니기 때문이다.
    KT에게는 슈퍼울트라초파워풀마제스티 어쩌고 2020년인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시즌 초반에는 작년보다 못해서 혹시 암흑기로 돌아가나. 싶었다.
    혹시도 아니지, 그냥 암흑기로 돌아온 줄 알았다. 내가 20년동안 야구를 봐 왔지만
    화가 나서 밤에 잠을 못 잔 건 이때가 처음이었으니 내가 밤잠을 설친 만큼이라도 이대은 연봉을 꼭 좀 깎았으면 한다.

    그리고 갑자기 승률이 미친듯이 올라갔다. 승률이 올라가니 곧 순위도 올라갔다.
    마치 마리오카트 AI 대전을 하듯이 순위가 올라갔다. 9,8,7,6…
    그리고 가을야구를 갈 수 있는 5위가 됐을 때는 너무 기뻐서 언니한테 우리 가을야구 갈 수 있다고 전화까지 했다.
    시즌 끝난 것도 아닌데 하여튼 그 정도로 기뻤다.

    중위권 싸움이 너무 치열해서 매일 순위표만 들여다보면서 이 팀이 지고, 이 팀이 이기면… 만 생각할 정도였다.
    진짜 정신병이 따로 없을 정도의 순위싸움이었다. 그래도 야구가 재밌었다. 이기니까. 매일 6시 30분만 기다렸다.
    시즌 막판이 되면 슬슬 윤곽이 보이겠지, 했던 그 순위싸움은 마지막 날까지 이어졌다.

    시즌 마지막 경기. 2위 KT, 3위 LG, 4위 키움, 5위 두산. KT와 한화, LG와 SK, 키움과 두산의 맞대결.
    이기면 자력 2위, 지면 타 경기 결과에 따라서 내려가는, 심플하다면 심플한 계산법.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솔직히, 그래, 한화니까, 게다가 국내투수니까, 나는 쉽게 이길 줄 알았다.
    하지만 좁혀지지 않는 점수차.
    그렇구나. 2015~2017에 남들이 우리 팀을 이렇게 봤겠구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LG SK전을 틀었다.
    지고도 자력 2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LG-SK에서 SK가 이기고 키움-두산에서 두산이 이기는,
    그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리고 SK가 시즌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지었을 때 나는 벙쪄 있었다.

    KT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아마 이게 야구만화였다면 작가를 욕했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경우의 수를 뚫고 플레이오프 직행 티켓을 거머쥔 것이었다.
    그 순간 머리에 AAA96이 스쳐 지나갔다. 아, 이런 순간이 정말 오기는 하는구나.

    그런데 정작 플레이오프는 쓰레기 그 자체였다.
    투수들한테 뭐라고 하지는 않겠다. 쿠에바스는 솔직히 잘했다. 걔가 시즌 내내 퐁당퐁당 투구로
    고홈이라는 말을 어떨 때 쓰는 건지를 알려줬긴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잘했다.
    고졸신인 소형준.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소형준은 소형준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어떤 투구를 했는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빠따. 야수들이 수준 이하였다.
    이딴 게 가을야구라고 외신에 소개될 게 부끄럽지도 않은지.
    그 중에서도 그래. 유격수. 선발 유격수 누군지 뻔하니까 이름 안 적는다.

    정말 실망했다. 나는 야구를 못해서 걔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그랬으면 시즌 중에 20몇타석 연속 무안타니 뭐니 그 지랄을 했을때 화를 냈겠지.
    그때는 측은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양준혁도 뻔히 아웃될 타구일 걸 알아도 1루까지 전력질주를 했는데 플레이오프 타율 0.00이?

    그리고 유격수가 화려하고 멋있는 포지션인 건 나도 이해한다.
    하지만 정면타구는 흘려보내고 어려운 타구를 굳이 잡아서 처리해주는 것보다는
    잡을 거 잡고, 어려운 건 어쩔 수 없지 했으면 좋겠다.
    사람새끼처럼 1인분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첫 술을 먹어보려는 노력은 했으면 좋겠다.
    이런 슈퍼울트라초파워풀마제스티 2020은 이딴식으로 끝나면 안 됐다.

    나머지는 잘했다. 열심히 했다. 왜 부모님들이 수능 날 아무 말도 않고 잘했다는 말을 해주는지 이해됐다.
    내년은 더 잘해봤으면 좋겠다. 가능하다면 새로운 유격수랑.

    반응형

    '일기 > 공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꼴좋다  (0) 2021.01.25
    해체해  (0) 2021.01.13
    뉴비를 위한 야구용어  (1) 2020.09.28
    헷갈리는 야구 룰 (포스아웃/태그아웃, 인필드 플라이)  (0) 2020.08.19
    일본 야구용어  (1) 2020.08.07
    COMMENT